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좋은 트로트를 듣고 싶어질 때

꼭 <테스형>이 아니라도 좋은 트로트 곡은 많다.

2020. 11. 09

Writer 이기원 : 세상 모든 물건과 금방 사랑에 빠지는 콘텐츠 제작자.

트로트

나훈아의 추석 맞이 공연이 이렇게 엄청난 반응을 끌어낼 지는 몰랐다. 나훈아가 누군지도 몰랐을 10대와 20대들조차 그의 기백에 감동받은 눈치다. ‘테스형, 세상이 왜 이렇게 힘들어’라고 소리내어 묻던 나훈아의 모습은 트로트의 힘을 새삼 느끼게 해줬다.

최근의 트로트는 다소 듣기 창피한 멜로디와 가사들로 스스로 가치를 깎아 내린 경우가 많았지만, 트로트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20세기 중후반까지만 해도 좋은 곡들이 아주 많았다. 팝도 좋고 걸그룹도 좋고 잔잔한 인디 음악도 좋지만, 살다 보면 중후한 색소폰 소리가 더 가슴에 와닿는 경우도 생긴다. 늦가을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좋은 트로트곡을 준비해봤다. 트로트는 아니지만 그 시절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곡들도 일부 추가했다.

조용필 <대전부르스>

조용필

조용필은 트로트와 록, 발라드를 아울렀던 그야말로 가왕이다. 데뷔 초기에는 트로트 성향의 곡을 많이 불렀는데 1집에 실린 <대전부르스>는 조용필 신드롬의 시작을 알리는 곡 중 하나였다. 수많은 가수들이 대전 부르스를 커버했었지만 누구도(심지어 원곡 가수인 안정애 마저도) 조용필 버전을 이기지 못한다. 앳된 얼굴로 이 노래를 열창하는 조용필의 모습은 그야말로 차밍해서, 그가 왜 오빠부대의 원조인지 알 수 있다.

나미 <입술에 묻은 이름>

나미

요즘 유튜브에는 시티팝의 열풍을 타고 재발견되는 80~90년대 노래들이 많다. 특히 나미의 노래가 많은데, 그건 당대에 그만큼 세련된 댄스팝을 선보였다는 뜻이다. 댄스곡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많이 얻다 보니 정작 보컬로서 나미의 매력이 많이 드러나지 못했던 건 아쉬운 부분이다. 나미는 정말 멋진 목소리를 가진 가수였다. <입술에 묻은 이름>은 나미의 허스키 보이스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보여주는 곡이다. 늦가을에 정말 어울리는 곡이니 꼭 한 번 들어보기를 권한다. (요즘 유튜브에서 재평가되고 있는 <당신의 모든 것이 다 좋아요> 같은 곡도 함께 들어보길 권한다).

배호 <안녕>

배호

29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배호는 6년 여의 신장염 투병생활 중에도 많은 곡을 누리며 큰 인기를 누렸다. 그 생의 한계 때문이었는지, 유독 절절하게 느껴지는 노래가 많다. 배호의 대표곡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<안녕>은 그의 불운했던 개인사와 겹쳐져 더욱 구슬프게 들린다.

최무룡 <꿈은 사라지고>

최무룡

최무룡은 당대 최고의 배우이자 가수였고, 심지어 국회의원이었다. 20세기가 바라던 시대적 쾌남의 대표격이라 할 만했다. 이 노래는 최무룡이 주연한 영화 <꿈은 사라지고(1959)>의 주제곡이었는데, 가사가 참 운치 있다.

‘나뭇잎이 푸르던 날에

뭉게 구름 피어나듯 사랑이 일고

끝없이 퍼져 나간 젊은 꿈이 아름다워

귀뚜라미 지새울고 낙엽 흩어지는 가을에

아 꿈은 사라지고 꿈은 사라지고

그 옛날 아쉬움에 한없이 웁니다’

최헌 <앵두>

최헌

‘최헌의 중저음은 한강 이남 최고'라고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. 실제로 대단한 고음도 아니고 개성 있는 목소리도 아닌데 이상할 정도로 귀에 착착 감긴다.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조마조마해 하는 남자의 마음이 귀엽다. 그 유명한 <오동잎>과 함께 듣기를 권한다.

김수희 <아모르>

김수희

<남행열차>나 <애모> 같은 곡이 큰 인기를 얻긴 했지만 오히려 김수희는 엘레지(슬픈 정서의 노래)를 부를 때 제일 빛났다. 김수희가 슬픈 노래를 부르면, 비련이라는 단어의 뜻이 몸으로 스며드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. 이 노래에서 김수희가 ‘너 없이 백년을 혼자 사느니 너와 함께 하루를 살겠어’라고 노래하는 대목을 듣고 있으면 그 비장함과 처연함에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. ‘김수희 슬픔 3종세트’로 <멍에>와 <마지막 포옹>도 함께 권하고 싶다.

김정호 <아무도 없는 거리>

김정호

신인가수 조용필이 <돌아와요 부산항에>로 전국구 스타로 거듭나던 즈음, 김정호라는 또래 가수도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. 조용필이 도시적인 세련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면, 김정호의 노래는 좀 더 고풍스러운 면이 있었다. 몸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것 같은 선 굵고 따뜻한 목소리는 지금 들어도 가슴을 아린다. <아무도 없는 거리>는 그 목소리의 힘을 느낄 수 있는 곡이다. 스스로 곡을 만들던 재능 있는 젊은 뮤지션은 아쉽게도 폐결핵으로 요절하며 ‘비운의 천재’로 남고 만다. 그의 나이 32세였다.

혜은이 <새벽비>

혜은이

혜은이의 초창기 무대를 보면 세 번 놀라게 된다. 미모에 한 번, 안정된 보컬에 한 번, 세련된 무대매너에 한 번. 거의 50년 전의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영상 속 혜은이는 티브이를 뚫고 나올 것처럼 반짝반짝 빛난다. 한국 가요 역사 상 아이돌이라고 부를 만한 최초의 가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. 혜은이를 발굴했던 작곡가 길옥윤의 전성기를 느낄 수 있는 곡이기도 하다.

이은하 <아직도 그대는 내사랑>

이은하

70년대를 양분했던 두 명의 여가수가 있었다. 앳되고 청순한 미모의 혜은이가 ‘당신은 모르실 거야'로 전 세대에 폭발적인 사랑을 받은 반면, 13살에 데뷔했던 이은하는 나이를 잊게 만드는 허스키하고 끈적한 보이스로 어르신들의 마음을 울렸다. 이 곡은 이은하가 1976년, 17세의 나이에 불렀던 곡이다. 이 어린 소녀가 어쩜 이렇게 에스프레소 같은 목소리를 냈는지, 신기할 지경이다.

주현미 <추억으로 가는 당신>

주현미

주현미를 ‘트로트의 여왕'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음정과 리듬감, 외모까지 어디 하나 뺄 데 없는 완전체에 가까운 가수기 때문이다. 주현미의 목소리는 트로트라는 장르에만 묶어 놓기에는 굉장히 세련되고 예뻤는데, 그래서인지 <밤비내리는 영동교> 풍의 정통 트로트보다는 약간 리듬이 있는 곡을 부를 때 더 빛난다. 주현미의 매력이 가장 잘 드러나는 노래다.

심수봉 <비나리>

심수봉

심수봉의 노래는 여전히 후배 가수들에 의해 많이 리메이크된다. 심수봉의 노래에 세대를 뛰어넘는 힘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. 그 중 특히 많이 커버되는 곡이 <비나리>다. 거미나 알리 같은 톱 레벨의 가수들이 이 노래를 커버했었고, 모두가 각각의 스타일로 잘 소화해냈다. 하지만 이렇게 잘 부른 커버곡을 들을 수록 심수봉이라는 아티스트의 위대함을 느낀다. 원곡이 그만큼 훌륭하다. ‘나만을 사랑하면 안될까요' 라고 읊조리는 대목에서는 심장이 굳어버리는 것 같다.

최백호 <길 위에서>

최백호

최백호처럼 멋진 목소리를 가진 가수가 얼마나 될까. 70세 가까운 나이에도 여전히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경이로운 마음까지 든다. 그가 2012년 환갑이 넘어 발표한 이 노래는 트로트는 아니지만 너무 애잔하고 슬프다. 외롭고, 쓸쓸하고, 허무하고, 마음이 구겨져버린 것 같은 어느 날, 이 노래를 들으면 실컷 울 수 있다.

남진 <상사화>

남진

이번 나훈아 추석 공연의 가장 큰 피해자는 남진일 지도 모른다. 당대의 라이벌이었던 나훈아가 80세가 가까운 지금까지 스스로를 날카롭게 벼려왔던 것에 비하면 남진은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인생의 후반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. 평생의 경쟁자인 나훈아에게 쏟아지는 하이라이트가 그렇게 속 편할 리 없다.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빛나는 과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.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슈퍼스타의 가장 좋은 노래 중 하나인 <상사화>를 들어보자. 모란과 동백의 이미지가 눈 앞에 아른거린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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